글밭/시(詩)를 찾아서[1]

저물 무렵 - 안도현시인의 시

꿈꾸는 초록강 2009. 1. 11. 13:12

- 그리움에 대하여4-

저물 무렵- 안도현

 

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

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

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

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

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

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

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

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

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

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

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

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

그애와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

그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

나는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

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

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

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

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

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

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

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

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

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

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

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

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

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.

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

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

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

저물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

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

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

 

 

 

 

안도현 시인(詩人)

 

 

 1961년 경북예천에서 출생.원광대국문과를 졸업.

1981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, (낙동강)이 1984년 동아일보

 신춘문예에 시, (서울로 가는 전봉준)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.

시집 <서울로 가는 전봉준><모닥불><그대에게 가고 싶다><외롭고 높고 쓸쓸한 밤>

<그리운 여우><바닷가 우체국>등을 냈다. 어른을 위한 동화 <연어><관계>사진첩>

<짜장면>과 산문집 <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>등이 있다.

1996년 '시와시학'신인상을, 1998년 '소월시문학상'을 수상했다. 

 

자료출처

시:그대에게 가고 싶다, 안도현, 푸른숲 2001년12월

사진: 풍경사진 모음 <photo.com>- E.Vance

배경음악: 마이클호페, Pieces of Moon, 다음음악샵

 

Posted by 남한강 11.01.2009 

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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