우표 한 장 붙여서
천양희
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
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
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
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
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,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.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
천양희 시인은, 1942년 부산 출생, 1965년 《현대문학》으로 등단, 시집『신이 우리에 게 묻는다면』『사람 그리운 도시』『하루치의 희망』『마음의 수수밭』『오래된 골 목』『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』『너무 많은 입』등 <현대문학상><박두진문학 상><공초문학상>등 수상.
* 출처:시, 사랑에 빠지다, 천양희, 장석남 외 지음, 현대문학, 2009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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