글밭/시(詩)를 찾아서[2]

봄비-이재무 시인의 시

꿈꾸는 초록강 2010. 3. 18. 16:08

 

봄비

 

이재무 詩人 

 

 

1

봄비의 혀가

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

보라, 젖을수록

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

봄비의 혀가

아직, 잠에 혼곤한

초록을 충동질한다

빗속을 걷는

젊은 여인의 등허리에

허연 김 솟아오른다

 

2

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에 가다오

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

살 속에 박힌 추억이 젖어 떨고 있다

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

보일 때까지 봄비여,

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

 

 

3

나를 살다간 이여, 그러면 안녕,

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어린 묘목 심는다

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

세상 속으로

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

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

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

새들이 넘나들며 울고

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

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

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

붐비는, 이 하염없는 추회

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

나를 떠나간 이여, 그러면 그대는 이미

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

늦도록 늦봄 싸돌아다닌 뒤

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

  

 
* 시의 출처: 위대한 식사, 이재무 지음, 세계사, 2002